낙지론(樂志論) 使居有 (사거유) 사는 곳에 良田廣宅 (양전광택) 좋은 밭이 있는 넓은 집이 있네. 背山臨流 (배산임류) 뒤에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며 溝池環匝 (구지환잡) 도랑과 연못이 빙 둘러 있고 竹木周布 (죽목주포) 대나무와 나무들이 펼쳐져 있네 場圃築前 (장포축전) 축대 앞에는 타작마당과 채소밭이 있고 果園樹後 (과원수후) 집 뒤에는 과수원이 있다네 舟車足以代步涉之難 (주거족이대보섭지난) 배와 수레가 있어 걷거나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덜어주고 使令足以息四體之役 (사령족이식사체지역) 심부름꾼이 있어 육체의 수고를 덜어 주네 養親有兼珍之膳 (양친유겸진지선) 온갖 진미로 부모를 봉양하고 妻孥無苦身之勞 (처노무고신지로) 아내와 자식들은 몸을 괴롭히는 일 없이 편안하네 良朋萃止 (양붕췌지) ..
내 꿈속의 벌목공 그는 거대한 톱을 들고 숲으로 걸어 들어온다 낡은 점퍼를 입고 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미로 같은 나무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햇빛은 눈부시고 그는 망연하다 어제 쓰러뜨린 나무들은 사라지고 없다 숲의 나무들은 다시 처음처럼 울창하게 서 있다 이 숲의 나무들을 다 베고야 말겠다는 벌목공의 야심은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 폭우가 쏟아지는 날도 눈 쌓인 날도 어제도 그는 열심히 나무들을 쓰러뜨렸지만 이내 자신의 등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나무들 이 거대한 톱이 원하는 것은 저 나무들이 아닐지도 몰라 그는 처음으로 톱이 두려워졌다 그는 쓰러지는 나무를 피해 다녔지만 톱을 멀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벌목이 끝나려면 내가 스스로 나무가 되어야 하는 걸까 그는 반짝이는 은..
세월 저편 (추억의 배후는 고단한 것 흘러간 안개도 불러 모으면 다시 상처가 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바라보는 것) 바람은 아무거나 흔들고 지나간다 여름 건너 하루해가 저물기 전에 염소 떼 몰고 오는 하늘 뒤로 희미한 낮달 소금 장수 맴돌다 가는 냇물 곁에서 오지 않는 미래의 정거장들을 그리워하였다 얼마나 먼 길을 길 끝에 부려두고 바람은 다시 신작로 끝으로 달려가는 것인지 만삭의 하늘이 능선 끝에 제 내부의 붉은 어둠을 쏟아내는 시간까지 나 한 번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그 먼 강의 배후까지를 의심하였다 의심할 때마다 계절이 바뀌어 그 이듬의 나뭇가지 젖은 손끝에 별들이 저무는 지평까지 나는 자라고 풍찬노숙의 세월을 따라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어디까지 흘러가면 아버지 없이..
아슬아슬한 내부 아내 몰래 7년을 끌어온 연애가 끝이 났을 때 아들은 문득 백 점 맞은 받아쓰기 답안지를 꺼내 보이고 나는 민방위 소집 훈련에서마저 풀려나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새 내겐 아들 하나가 더 생겼고 직장은 바뀌었으며 은행 빚은 더 늘었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아내는 그동안 내 연애를 눈치채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내가 새삼 각성해야 할 만큼 문제를 삼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이 지혜로운 무관심이거나 참을성 또는 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을 따돌리고 외출하거나 어떤 거짓말로든 늦게 귀가를 하고 때로는 외박을 하기 위해 지어낸 노력만큼 아내에게도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자존심보다 더 ..
밤이 간다 검은 아궁이 앞에서 외숙모와 나는 불을 지핀다 한 손에 부지깽이를 들고 저 환한 아궁이 속을 들여다본다 가마솥에는 조청이 들어 있다 밖은 어스름에서 어둠으로 변하고 파란 불은 금세 붉은 불로 변한다 저 많은 조청은 누가 다 먹나요 이가 없는 노인들에게 먹여야지 외숙모는 부지깽이로 아궁이 속 더 깊은 곳을 쿡쿡 찌른다 나는 입을 다물고 앞니가 빠진 빈 곳에 슬며시 혀를 집어넣어본다 뚜껑 열린 가마솥에서 무언가 힘없는 비명처럼 솟아올랐다 꺼진다 외숙모는 커다란 주걱으로 검은 조청을 휘젓는다 나는 구석에 쌓인 나무를 조금씩 날라 오고 나무는 재로 변하고 나는 이가 없는 노인처럼 기운이 없다 이 조청은 언제까지 고아야 하나요 이제 겨우 반쯤 끓인걸 저 검은 조청 속에는 무엇이 들었나요 죽은 사람들의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
가족의 힘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 류근 (문학과지성사, 2010) (사진 : 강원도 삼척, 2010.08.07 친구 duta1012가 촬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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