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부엉이 밤부엉이 한 마리가 창가에서 나를 꼬나보기 시작했어. 나는 허둥거리며 내 몸의 모든 기관들을 닫아 버렸지만 부엉이의 눈빛이 오토머신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열고 노란 방사선을 쏘아 부었어. 나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차갑게 용해되어 갔어. 이윽고 잠, 닫혀진 회색 강철 바다, 속으로 한 사내의 그림자가 숨어들어 내 꿈의 뒷전을 어지러이 배회하고 환각처럼 흔들리는 창가에서, 누구시죠? 내게 희미한 두통과 고통을 흘려 붓는, 누구시죠? 내 사산(死産)의 침상에 낮게 가라앉아, 누구시죠? 누구 누구 누구……? 밤부엉이가 밤새 내 지붕을 파먹었어. 아침엔 날이 흐렸고 벌어진 큰골 속으로 빗물이 뚝뚝 흘러들었어. 이미 죽은 내 몸뚱이 위에 누군가 줄기차게 오줌을 깔기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내일 아침이 살기 싫으니 이대로 쓰러져 잠들리라,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리라. 그러나 자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누울 곳 없는 정신은 툭하면 집을 나서서 이 거리 저 골목을 기웃거리고, 살코기처럼 흥건하게 쏟아지는 불빛들. 오오 그대들 오늘도 살아계신가, 정처 없이 살아계신가. 밤나무 이파리 실뱀처럼 뒤엉켜 밤꽃들 불을 켜는 네온의 집 창가에서 나는 고아처럼 바라본다. 일촉즉발의 사랑 속에서 따스하게 숨쉬는 염통들,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애인들의 배를 베고 여자들 남자들 하염없이 평화롭게 붕붕거리지만 흐흥 뭐해서 뭐해, 별들은 매연에 취해 찔끔거리고 구슬픈 밤 공기가 이별의 늴리리를 불러대는 밤거리. 올 늦가을엔 새빨간 루즈를 칠하고 내년엔 실한 아들 ..
언젠가 다시 한번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舞蹈)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 최승자 (문..
고요한 사막의 나라 만리동 다리 위에서 삼십 세의 인생은 눈이 멀어 헤맨다. 지하도에 빠지고 육교 위로 불려 가고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랑은 어질어질하므로 황홀하다. 철새는 날아가고 사회적 문화적 애인은 비명횡사한다. 개새끼 잘 죽었다, 너 죽을 줄 내 알았다. 오늘도 암스테르담엔 노란 햇빛 비치고 플로렌스에선 그리운 꽃들이 피어난다. 언제나 가 볼 수 있을까 죽음다운 죽음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너의 웃음이 시원한 사이다 한 잔으로 쏟아지고 우리의 고질적인 사랑이 영화처럼 쉽게 끝났다가 심심하면 또 영화처럼 쉽게 시작될 수 있는 곳으로. 한참 걸어가다 보면 멀쩡한 두 발이 해진 신발짝으로 변하고 평생토록 내가 끌던 소달구지에 이제 내 시체가 실려 나갈 고요한 사막의 나라가 아닌 곳으로 그러나 모래의 고장..
꿈 대신에 우리는 꿈 대신에 우리는 확실한 손을 갖고 싶다. 확실한, 물질적인 손. 아랍의 정의에는 칼! 아메리카의 정의에는 총! 한국의 정의에는 술! 수울? 그러나 확실함은 언제나 우리의 비몽사몽뿐, 철끈처럼 팽팽한 안개 속엔 죽은 헬리콥터들이 떠 있고 정권이 바뀌어도 이제 우린 무덤 속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먼 나라에서 문득문득 편지가 오고, 우리는 읽지 않고 돌려보낸다. 그리고 늦은 밤, 수면을 걱정하며 우리는 책을 덮고 갑자기, 닫혀진 어느 역사책 속에서 누군가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하고 우리는 주문을 외우며 잠자리에 든다. 내 주여 이 잔을, 할 수만 있다면 당신 목구멍에 흘려 넣으소서. - 최승자 (문학과지성사, 1984) (사진 : 양주 삼숭동, 2015.01.05)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
20년 후에, 지(芝)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江)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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