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가 있는 풍경

언젠가 다시 한번 / 최승자

꿈꾸는 무인도 2015. 6. 29. 15:46

   언젠가 다시 한번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舞蹈)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 최승자 <즐거운 日記> (문학과지성사, 1984)

 

 

  (사진 : 양주 삼숭동, 2015.01.05)

 

  최승자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묘하게도 시집을 손에서 쉽게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마력과도 같은 힘이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는 삶은 차라리 눈물겹도록 혹독하다. 실체가 없는 삶! 흉내뿐인 삶!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 역시 흉내에 지나지 않는 또 다른 고통이다.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너를 만나려 하지만...... 너는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낯선 모퉁이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야만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어디에도 없는 너'는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