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 소풍 나온 처녀애들 싱싱한 허벅지 위에 맥고모 쓴 노인의 누런 막대지팡이 위에 평등하게 부서지는 햇살 일요일 오후 덕수궁 돌담길에 봄이 오다가 브레이크가 걸렸다 너도 한때 이 길에서 청춘의 꿈들을 주워올렸지 뗐다 붙였다 네 멋대로 모자이크했었지 어떤 잔인한 세월들이 이 봄을 밟고 갔던가 얼마나 많은 봄들이 이 길에서 피기도 전에 스러졌던가 우리가 버린 꿈의 조각들이, 버렸다 애써 다시 기운 희망들이 일요일 오후 덕수궁 돌담길에서 휘청거리며 빛나고 있다 - 최영미 (창작과비평사, 1998) (사진 : 덕수궁 담장, 2015.10.09)
불면의 일기 어떤 책도 읽히지 않았다 어떤 별도 쏟아지지 않았다 고통은 이 시처럼 줄을 맞춰 오지 않는다 내가 떠나지 못하는 이 도시 끝에서 끝으로 노래가 끊이지 않고 십년보다 긴 하루가 뒤돌아 제 그림자를 지워나갈 때 지상에서 마지막 저녁을 마시러 버스를 탄다 밤은 멀었지만 밤보다 더 어두운 저녁에 차창가에 닻을 내린 한숨이 묻어둔,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아직도 낯선 과거를 불러낸다 서로 빠져나오려 싸우는 기억들이 서로를 삼키는 시간 왜?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것들을…… 용서하지 못하는가 잃어버린 삶의 지도를 찾아 그리는 눈동자 속에 흔들리며 떠 있는 나무 한그루, 병든 잎들이 바람에 몸을 떨며 아우성친다 얼마나 더 흔들려야 무너질 수 있나 우리가 변화시킨 세상이, 세상이 변화시킨 우리를 비웃고..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 최영미 (창작과비평사, 1994) (사진 :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친구인 duta1012의 사진을 무단으로 도용함. 강원도 양구 두타연의 햇무리, 2013.06.16) 아도니스(Adoni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으로, 미의 여신(女神)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사랑을 받았..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 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 최영미 (창작과비평사, 1994) (사진 : 양주 삼숭동, 2013...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 끝의 허망한 한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성처..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창작과비평사, 1994) (사진 : 양주 삼숭동, 2014.04.02) 젊은 시인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 표현력에 반해 한번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시입니다. 군에서 제대하기 전, 신문에 실린 이 시를 보고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동안 정신줄을 놓아버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간결한 시어로 특별한 수사나 비유도 없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낼 줄 아는 시인의 역량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세월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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