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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가을에는 / 최영미

꿈꾸는 무인도 2015. 4. 29. 23:36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 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4)

 

  (사진 : 양주 삼숭동, 2013.10.30)

 

 시인의 감성 표현이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듯 아슬아슬하기만 합니다. 격랑의 1980년대와 90년대를 살아온, 시대 정신을 온몸으로 체감한 시인이라 그런지 이런 연가풍의 감성도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애틋함도 느껴집니다. 오늘은 봄비 내리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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