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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아슬아슬한 내부 / 류근

꿈꾸는 무인도 2017. 2. 28. 18:25

 

    아슬아슬한 내부

 

  아내 몰래 7년을 끌어온 연애가 끝이 났을 때

  아들은 문득 백 점 맞은 받아쓰기 답안지를 꺼내 보이고

  나는 민방위 소집 훈련에서마저 풀려나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새 내겐 아들 하나가 더 생겼고

  직장은 바뀌었으며 은행 빚은 더 늘었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아내는 그동안 내 연애를 눈치채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내가 새삼 각성해야 할 만큼 문제를 삼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이 지혜로운 무관심이거나 참을성 또는

  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을 따돌리고 외출하거나

  어떤 거짓말로든 늦게 귀가를 하고

  때로는 외박을 하기 위해 지어낸 노력만큼

  아내에게도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자존심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내야할 그 무엇인가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 옛날 폭력을 일삼던 수학 선생의 주먹을 참아내던 일

  더 부당한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고 군대를 마쳤던 일

  시궁창까지 야비하고 비겁했던 상사와 거래처 인사들을

  결국 죽여버리지 않고 퇴근해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던 일처럼

  아내 역시 한꺼번에 뒤엎어버리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경계가

  무엇인가의 아슬아슬한 내부가 늘 있지 않았을까

 

  7년의 연애가 끝나고 나는 결국 몹시 헐거워졌으나

  아이들은 자라고 아내는 그토록 잘 속아주었으나

  이제 어떤 것도 더는 속여먹을 수 없는 생애가

  내 앞에 고지서처럼 툭 떨어져 나부끼고 있을 때

  나 역시 아내의 내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내부의 그 무엇이 되어 있다는 것이 어리둥절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류근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2016)

 

 

  (사진 : 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016.12.31)

 

 아슬아슬하게 숨겨온 내면을 읊조리듯 고백하는 화자의 독백 속에서 위태롭기만 한 중년 가장의 아찔함을 느껴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자랑하듯 내세우기보다는 되려 꽁꽁 숨겨 놓아야 할 은밀한 나날들을, 그래도 저건 너무 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솔하게 표현하는 시인의 무모함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 하는 광대를 보는 것도 같습니다. 부채 하나에 의지해 온 몸의 균형을 가까스로 잡아가는 광대의 몸짓이 마치 시에 의지해 위태롭게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시인(화자)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요? 화려한 수사나 시적 장치들을 통해 알듯 모를 듯 심오한 의미를 나열하여 독자를 괴롭히는 여느 시들과 달라서, 자꾸 류근의 시를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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