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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밤이 간다 / 강성은

꿈꾸는 무인도 2017. 2. 28. 10:37

 

 

    밤이 간다

 

  검은 아궁이 앞에서 외숙모와 나는 불을 지핀다 한 손에 부지깽이를 들고 저 환한 아궁이 속을 들여다본다 가마솥에는 조청이 들어 있다 밖은 어스름에서 어둠으로 변하고 파란 불은 금세 붉은 불로 변한다 저 많은 조청은 누가 다 먹나요 이가 없는 노인들에게 먹여야지 외숙모는 부지깽이로 아궁이 속 더 깊은 곳을 쿡쿡 찌른다 나는 입을 다물고 앞니가 빠진 빈 곳에 슬며시 혀를 집어넣어본다 뚜껑 열린 가마솥에서 무언가 힘없는 비명처럼 솟아올랐다 꺼진다 외숙모는 커다란 주걱으로 검은 조청을 휘젓는다 나는 구석에 쌓인 나무를 조금씩 날라 오고 나무는 재로 변하고 나는 이가 없는 노인처럼 기운이 없다 이 조청은 언제까지 고아야 하나요 이제 겨우 반쯤 끓인걸 저 검은 조청 속에는 무엇이 들었나요 죽은 사람들의 그림자들이지 이리 와서 자세히 보렴 나를 집어넣을 건 아니죠 저런 어쩌다 너는 이렇게 늙은 게냐 네가 어린아이였을 땐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그림자들에게 인사도 곧잘 했는데 이젠 알아보지도 못하는구나 외숙모는 혀를 찼다 나는 아직 어린걸요 외숙모는 부지깽이로 아궁이 속을 쿡쿡 쑤신다 나무를 더 넣어라 나는 아궁이 속에 나무를 집어넣고 앉아서 꾸벅꾸벅 존다 타오르는 불은 환하고 예쁘고 달다 이는 하나씩 더 빠지고 나는 이가 사라진 자리에 더디게 혀를 넣어보고 졸면서 나는 정말 늙어버린 걸까 생각하고 어째서 조청은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고아야 하나 생각도 잠시 잠든 나를 깨우며 외숙모는 나에게 한 그릇을 내민다 후루룩 마시렴 후루룩 나는 반쯤 뜬 눈으로 내 앞의 검은 조청과 아궁이 속의 불꽃이 희미해져가는 걸 본다

 

   -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13) 

 

 

  (사진 : 강원도 양양, 2014.05.05)

 

 어렸을 적, 해마다 겨울이 되면 어머니께서는 가마솥에서 엿을 고았습니다. 옥수수로 엿기름을 만들어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를 지키며 몇 시간 동안이나 불을 때서 조청을 만들어 일부를 따로 작은 항아리에 퍼담아 놓고, 남은 조청을 다시 몇 시간 동안 다시 고아 엿을 만드셨지요.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습니다. 가끔 가마솥 안쪽에 엉겨 붙은 달착지근한 엿 맛이 감도는 엿 찌꺼기 같은 것들을 숟가락으로 긁어먹다가 혓바닥과 입천장을 데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완성될 것 같지 않은 끝없는 기다림에 지쳐 방에 들어가 뜨끈뜨근한 아랫목에서 잠시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가, 하루 종일 장작의 불기운을 흡입한 온돌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기도 했지요. 다시 아궁이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보면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가마솥을 휘저으며 아궁이 앞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가마솥 안의 조청에 적당한 점성이 생기면 커다란 쟁반 위에 보자기를 깔고 엿을 퍼담아 하루 정도 건조하면 맛난 엿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눈 쌓인 밭에서 눈썰매를 타다가도, 동네 친구들과 얼음판 위에서 신나게 얼음 썰매를 지치다가도 문득 엿 생각이 나면 냅다 집으로 달려와 엿을 입안 한가득 물고 오물거리도 하고...... 

 이젠 시골에도 아궁이와 온돌방이 없어져 버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다 엿을 고는 풍경은 어쩌다가 옛날 흑백사진첩을 뒤적거리다가 만난 어릴 적 시골 아이의 낯선 모습처럼 희미해진 추억으로만 남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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