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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힘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 류근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사진 : 강원도 삼척, 2010.08.07 친구 duta1012가 촬영한 사진을 무단으로 도용함. 저 레일바이크에 무인도 가족이 타고 있음)
류근의 시는 한없이 인간적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 냄새가 납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슬픔이라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 앞에서 냉철한 이성을 잠시 숨겨 둡니다. 대신 한없이 미숙하고 어리석기만 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으며 재미나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굳이 힘들게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 해체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들의 슬픈 자화상을 은근슬쩍 덮어버리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지요.
이성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남성성(男性性)과, 그에 대비되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 자애로운 모성(母性)의 어색한 조화가 위태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네는 아내의 모습과,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독자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게 되지요. 그만큼 시인의 유머에 은근슬쩍 빠져들게 됩니다. 마치 성석제의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도 들지요. 어떻게 보면 시인은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서정(敍情)과 서사(敍事)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작가적 역량에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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