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할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나랫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고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도 잠잠해졌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 나태주 (종려나무, 2009) (사진 : 강원도 양양, 2016.08.05) 지난 여름, 양양에서 물총새를 보았습니다. 위의 시에서처럼 해가 저물 무렵은 아..
나의 간디 그해 겨울 꽁꽁 얼어 빛나던 스무 살 간디의 영혼이 러스킨의 사르보디아를 읽고 있을 때 한 그루 미류나무에서 자라던 잎새들은 이발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빛이 되고 어둠이 되어 흔들렸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나의 간디 키 낮은 주막집 어두운 불빛 아래서 부른다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빈손으로 귀가하는 젖은 머리 위 한 떼의 안개로 몰려드는 봄베이의 슬픔 술기 오른 골목길은 문득 갈대밭이 되고 먼저 떠난 친구의 혼백이 서 있다 문패처럼 살아서 그대 기다리는 나는 자다가도 깨어나 전화를 하고 울리지 않는 벨소리 듣는 밤 혼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새처럼 높은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 그대 맑은 영혼을 생각한다 책으로만 둘러싸인 조그만 방 깊숙이 노오란 풀씨 한 톨 떨구고 싶던 그날을…… 높이 높..
벚꽃나무가 내게 모리스 장드롱은 첼리스트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벚꽃나무가 생각난다 첼로의 숲에 그의 나무를 심어놓지 않아 섭섭했다고 시인 장석남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의 연주는 너무 프랑스적이라 사실 나를 사로잡진 못했지만) 벚나무 아래 누워본 적 있는가 낙화가 곧 개화인 벚꽃나무 지난봄, 산길을 걷다 그 아래 자리도 깔지 않고 그냥 누워버렸다 벚꽃잎들의 낙화, 그 아스라한 순간들…… 바람이 눈길만 주어도 꽃잎들은 솨 사방으로 흩어졌다 얼마나 더 가벼워질 수 있는가 꽃잎 지는 소리가 세상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너무 가벼워, 지상에 내려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허공을 맴도는 꽃잎들의 群舞(군무)…… 꽃잎들은 춤을 추며 벚나무 아래 누워 있는 나의 몸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꽃잎이 치고 간 자리가 한동안 욱신..
자리 무엇이 있다가 사라진 자리는 적막이 가득하다 절이 있던 터 연못이 있던 자리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 꽃이 머물다 간 자리 고요함의 현현, 무엇이 있다 사라진 자리는 바라볼 수 없는 고요로 바글거린다 - 조용미 (창작과비평사, 2000) 빈 의자들...... 작년 겨울에도 보았었지요.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시작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 길가에 버려진 텅 빈 의자에 진한 안타까움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습니다. 한때는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이었겠지만, 이젠 잊힌 존재가 되어 쓸쓸하게 세월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흐를지라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기억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마음속 깊은 곳에 힘들게 꾹꾹 눌러 담으며 살아갈 수밖에 ..
얼음새꽃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트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 곽효환 (문학과지성사, 2010) 학교 운동장 옆에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의 대지를 뚫고 가장 먼저 솟아오르는 복수초(얼음새꽃)처럼, 우리 학생들이 대학 입시라는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목표하는 바를 성취하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2010년 12월..
수수밭에서 수수밭에 서면 내 어릴 적 꽃고무신이 보이고 안경알 같은 하늘이 보인다 하늘 속으로 자맥질하는 잊을 수 없는 얼굴들 막막한 눈시울 속으로 내리는 조금씩 삭고 있는 발시린 낮달이 보인다 잠잠이 타오르는 눈동자 오늘도 잠들지 못한 그 바람의 옷자락에 슬프고 긴 머리카락을 묻고 이 세상 끝까지 흔들릴 수 있는 자유는 없을까 가난이든 사랑이든 살을 섞으며 아득히 함께 흐르는 저 먼 노을처럼 바람부는 날이면 이따금 불면의 수수밭으로 나가 한세상 흔들리고 싶다 - 박라연 (문학과지성사, 1990) (사진 : 강원도 양양의 시골집 텃밭에서 영글어 가는 수수 이삭, 2015.08.07 )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의 뒷면 표지에 실린 시인의 말을 옮겨 봅니다. "내 추억의 문을 열면 온통 물빛이다. 청량..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정현종 (문학과지성사, 1978) (사진 : 강원도 양양 동호리 해변, 2015.09.27) 그렇지요. 사람이 꽃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풍경'으로 피어날 때도 가끔은 있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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