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밤 까주는 사람 이 사람아 산 채로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한번 더 벗겨내고 그리고 새하얀 알몸으로 자네에게 가네 이 사람아 세상이 나를 제아무리 깊게 벗겨놓아도 결코 쪽밤은 아니라네 그곳에서 돌아온 나는 깜깜 어둠 속에서도 알밤인 나는 자네 입술에서 다시 한번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이 될 것이네 - 박라연 (문학과지성사, 1993) 생밤의 껍질을 벗겨 봐야 '알밤'인지 '쪽밤'인지 알 수 있다. 혹여 쪽밤인들 어떠랴? '세상이 나를 제아무리 깊게 벗겨놓아도' 쪽밤도 알밤도 다 밤인 것을.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삶이라 할지라도 가을이 깊어가면 결국 어떻게든 밤이 될 놈은 밤이 된다.
萬然寺의 백일홍 단번에 눈치챌 수는 없다 만연사의 백일홍 그 여름의 신비를 한 생애의 비가 세상 지붕을 적실 때 너무 깊은 뿌리까지 적실 때 그때에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백제의 앞마당에 서서 음양처럼 마주보고 서서 여느 백일홍처럼 온몸에 붉은 꽃잎을 매달지만 그냥 꽃잎이라 부를 수는 없다 부처의 또 다른 분신인 양 수천 수만 맑게 뜬 꽃잎들의 눈이 나를 부르르 떨게 한다 벌에 쏘이듯 만연사의 백일홍 수천의 꽃잎들이 내 온몸을 쏘아댄다 퉁퉁 부어올라 영혼까지 부어올라 내 이름마저 잊을 때 그때에 소름 돋듯 돋아나줄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라도 그 무엇이라도 되면서 살아가자며 백일홍 붉은 꽃잎들이 나를 일으켜세울지도 모른다 - 박라연 (문학과지성사, 1993) (사진 : 블로그 'VIEW / 세상을 보다'에서..
촛불의 미학 촛불을 켠다 바라본다 고요한 혁명을 - 박정대 (세계사, 1997) 1975년 문예출판사에서 출판한 가스똥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프랑스의 시인이자 철학자)의 『촛불의 미학(La flamme d'une chandelle)』을 번역한 시인 이가림은 해설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지요. "촛불 밑에서는 깊은 잠이 들기 어려우며, 밤의 몽상(夢想)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과거의 모든 추억을 되살려 준다. 그리하여 상상력과 기억력이 일치하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촛불은 우리로 하여금 몽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이 다른 것과 융합하려고 하는 데 반해 촛불은 결코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것, 이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 그 자체이다...
학교 운동장 옆 절개지 옹벽에 2018학년도 수능 응원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인용했네요. 2005년 애지에서 펴낸 라는 시집에 실린 작품입니다. 그래요.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우리 반 녀석들도 그동안 참 열심히 공부해 왔지만, 앞으로 남은 57일이라는 시간을 끝까지 잘 활용해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같은 범인(凡人)들은 손에 들고 있는 열매 한 알을 놓고 그저 맛있게 먹을 줄만 알지, 그 열매가 손에 들어오기까지 농부의 무수한 손길은 물론 열매 스스로 견디어 온 숱한 인고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섬세한 시선으로 열매에 스며든 태풍과 천둥과 벼락, 그리고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을 포착하여 붉은 대추 한..
4月은 갈아엎는 달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것들. 미치고 싶었다. 四月이 오면 山川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四月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祖國(조국)에도 어느 머언 心底(심저),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四月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東學(동학)의 함성, 光化門(광화문)서 목 터진 四月의 勝利(승리)여. 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享樂(향락)의 不夜城(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漢江沿岸(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山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山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人情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신동엽 (창작과비평사, 1975) (사진 : 양주 천보산, 2013.04.27) 다시 4월이 되었습니다. 4월이 되면 으레 신동엽(1930.08.18~1969.04.07) 시인이 떠오릅니다. 그는 뜨거운 8월에 태어났지만 진달래꽃 붉게 타오르는 4월에 생을 마감하였지요. 이 작품은 그의 첫 시집인 (문학사, 1963)에 실려 있습니다. 시인은 4·..
평상이 있는 국숫집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 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 문태준 (문학과지성사, 2006) (사진 : 양주 삼숭동, 2014.04.23) 양주 삼숭동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나무의 안..
흰 부추꽃으로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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