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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꿈꾸는 무인도 2017. 4. 3. 00:08

   

     흰 부추꽃으로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 박남준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2000)

 

 

 (사진 : 강원도 양양, 2014.08.31)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고 혼자서 차를 몰고 도로에 나서는 순간 모든 것이 서툴게 느껴지지요. 제 아무리 도로 연수를 충분하게 받았다 할지라도 도로에서 혼자 하는 운전은 연습이 아닌 실제 상황이 되어 초보 운전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인생도 그러하지요. 꿈 많았던 학창 시절을 지나 본격적인 사회 생활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모든 것은 연습이 아닌 실제 상황이 되어 초보 운전자와 같은 어설픈 상황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힘겨운 하루를 보낸 뒤에는 '몸이 서툴다'고 생각하다가, 급기야는 반복되는 힘겨운 일상에 지쳐 '사는 일이 늘 그렇다'고 체념 아닌 체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옹이'는 나무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가지를 뻗기 위해 불가피하게 생성되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왕성한 생명력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가지를 뻗기 위해 한층 조직을 단단하게 형성하며, 새로 뻗을 가지로 내보낼 영양분을 충분히 축적해야 하기에 옹이 부분에는 나무의 진액이 잔뜩 엉겨 있게 마련이지요. 사람들이 장작을 팰 때 옹이 부분이 유난히 단단하여 도끼가 때론 빗나가기도 하지만 그건 옹이를 탓할 일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로서는 많이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시인은 '옹이'를 '상처'로 인식합니다.  시적 상상력은 그 어디에도 구속받아서는 안 되기에 옹이를 상처로 인식하는 시인의 인식에 공감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인식의 중심을 '인간'에 둘 것인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둘 것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시를 읽는 독자들의 몫이겠지요. 옹이 부분에 불을 붙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막상 불붙은 옹이는 쉭쉭 소리를 내며 잘도 타지요. 송진이 많이 함유된 소나무의 옹이는 불 때는 재미를 한껏 고조시키기도 합니다.  하여튼 불에 탄 나무는 재를 남기게 마련이고, 농부는 재를 모아 밭에 뿌립니다. 그러면 밭에서 자라는 식물은 그 재를 거름삼아 더욱 왕성한 생명력을 얻게 되어 싱싱한 몸뚱어리로 농부에게 보답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요. 나무 입장에서 볼 때 아궁이에서 불태워지는 것은 소멸(消滅)일 수도 있겠으나, 농부는 나무의 희생을 통해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적 화자가 농부의 수확물을 나무의 '환생'으로 인식하는 점이 이해가 되지요. 

 의미 없는 존재란 없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존재가 누군가에겐 아픔이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겐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입니다. 이름하여 '양가성(兩價性)이라고 하지요. 상대적인 두 가치를 동시에 가지는 성질이라고나 할까요? 나무의 희생이 단순한 '소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흰 부추꽃'이라는 또 다른 존재의 '생성'으로 이어진다는 윤회론적 인식이 이 작품의 근간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은 '옹이' 박힌 삶이 주는 고통과 상처를 초월하고자 하는 소망을 '흰 부추꽃'을 통해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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