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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의 초상2

창경궁의 가을 #01 전각

꿈꾸는 무인도 2022. 11. 5. 21:02

 2022년 11월 5일 토요일입니다. 오늘은 창경궁의 늦가을 모습을 옮겨 보겠습니다. 화려한 궁궐과 그 속에 감추어진 멋진 가을빛을 담아본다는 설렘도 잠시,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바로 1주일 전, 그러니까 창덕궁 모습을 옮기던 10월 29일 밤, 용산 이태원에서 그야말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형 참사가 발생했었지요.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온 수만은 인파가 좁은 골목길에 몰리게 되면서 불행하게도 150명이 넘는 희생자와 또 그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일주일이나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생사의 기로에 놓인 중상자가 많다고 하지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참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 기관에서 이러한 불행을 사전에 막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부상자들의 빠른 쾌유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2편으로 나누어 구성했습니다. 1편은 전각 중심으로, 2편은 춘당지 풍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보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도 창경궁 홈페이지에 실린 자료를 중심으로 수정 및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창경궁은 1483년(성종 14년)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등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수강궁은 1418년(세종 원년)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라고 하지요.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1616년)에 재건되었으나, 이괄의 난(1624년)과 1830년(순조 30년)의 대화재로 내전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광해군 때 재건된 후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초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09년(순종 2년)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개설되어 창경원으로 명명되었다가 1983년에 와서야 다시 본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았다고 하니, 참으로 한 많은 역사를 가진 궁궐이라고 하겠지요.

 

 

 먼저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서 시작합니다. 위 사진은 궐 안쪽에서 바라본 홍화문의 모습입니다. '홍화(弘化)'는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창경궁 창건 당시(1483년)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된 후 지금에 이른다고 합니다.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올려다본 홍화문의 모습입니다. 넘치는 인파와 역광으로 인하여 마음에 들만한 정면 사진은 다음을 기약하며 미뤄 두기로 합니다.

 홍화문은 임금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년)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백성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고 하며, 정조는 1795년(정조 19년)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모습이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고 하지요.

 

 

 안쪽 측면에서 올려다본 홍화문의 화려한 모습입니다.

 

 

 홍화문 바로 안쪽에는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된 옥천교(玉川橋)가 있습니다.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다리'라는 뜻이지요. 응봉산에서 흘러내리는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과 창경궁 북쪽의 춘당지를 지나 옥천교 밑으로 흐른다고 하지요.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보물(제386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두 개의 홍예(虹霓 - 무지개)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鬼面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옥천교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明政門, 보물 제 385호)이 나오는데, 최근 단청 보수공사를 하느라 가림막을 설치해 놓아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 명정문으로 들어서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이 보입니다. '명정(明政)'이란 ‘정사를 밝힌다’는 뜻인데,명정전은 조선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보 제 22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484년(성종 15년)에 처음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은 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이나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등 궁궐의 정전이 거대한 규모의 중층건물인데, 창경궁의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소박한 단층건물로 지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창경궁은 임금이 정치를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왕대비(王大妃)가 거주할 이궁(離宮)으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건물이 동쪽을 바라보게 지은 것도 같은 이유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외국 사신 접견 등의 공식적 행사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인종이 1544년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년)에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婚禮, 또는 가례(嘉禮)]가 치러지기도 했다고 하지요. 

 

 

 내부의 보좌(寶座 - 임금이 앉는 자리)는 3면에 4단의 나무계단을 설치하고 둘레에 연꽃모양의 기둥을 장식한 난간을 둘러 세운 다음, 가운데 뒤쪽에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구조물)을 놓고 그 뒤를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보좌 위 천장에는 화려한 짜임새의 포를 짜올려 만든 보개(寶蓋 - 탑의 덮개)를 얹고 보개 한복판에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나무조각을 붙여 왕의 자리임을 상징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천장은 감입천장(嵌入天障 - 중앙이 8각형으로 구성된 천장)의 구조로, 둘레에는 꽃무늬를 그린 정방형의 소란반자(斑子小欄 - 우물천장)를 둘렀으며, 바깥쪽으로는 한 단 낮게 소란반자를 두른 층단천장(層段天障 - 다층 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또 그 바깥쪽에는 견실하게 짠 공포(栱包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맞춘 나무)를 장식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내어 천장의 일부를 구성하게 하였습니다.

 

 

 

 명정전 뒤쪽에는 빈양문(賓陽門)이 있는데, 이 문은 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內殿)을 연결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을 가진 말로, 밝음을 뜻하는 양(陽)은 곧 임금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이 문을 지나면 왕의 사적 생활공간으로 통하기 때문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다고 합니다.

 

 

 명정전 추녀 위의 잡상을 봅니다.

 

 

 

 인정전 건축에 사용된 목재가 얼핏 보기에도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는 것 같고, 단청 또한 색이 바래 흐릿해 보이지만, 이 건물은 17세기 초의 목조 건축물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창덕궁 인정전 앞에 설치된 품계석은 석질이 고르고 매끄러운 고급 재질로 보였는데, 이곳에 있는 품계석은 상대적으로 표면이 거친 느낌을 줍니다. 흔하게 보이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명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행랑의 모습도 옮겨 봅니다.

 

 

 

 행랑에서 바라본 명정전의 모습입니다.

 

 

 반대편 행랑 너머로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명정전을 나와 함인정 방향을 바라봅니다. 순간과 영원의 사이를 어떻게 하면 거닐 수 있을까요?

 

 

 

 순간과 영원의 사이에서 다시 명정전 지붕을 올려다봅니다. 역광으로 전각 지붕의 기와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각 지붕의 기와가 잘 보이게 사진의 명암을 조절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붕 너머로 보이던 남산타워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순간과 영원이라는 시간은 공존하기 어려운 개념이기에, 말하자면 순간과 영원의 사이에 있는 그 어딘가를 찾기 위해 애를 쓰며 이리저리 거닐어 보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소나무 사이로 영춘헌(迎春軒)이 정면으로 보이며, 그 왼쪽에 집복헌(集福軒)의 일부가 담겼습니다. 

 

 이 건물들은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된 곳이라고 합니다. 영춘헌은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닌 건물이며, '복을 모은다'는 의미의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으로 연결된 서행각입니다.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동궐도에 따르면 두 건물은 원래 독립된 공간이었는데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하면서 집복헌이 영춘헌의 부속 건물처럼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집복헌은 1735년(영조 11년)에 사도세자, 1790년(정조 14년)에 순조가 탄생한 곳이라 합니다.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며 자주 머물렀고,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조화로움을 기른다'는 의미를 지닌 양화당(養和堂)입니다. 주로 내전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다고 하며,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지요. 

 

 

 또한 이곳은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가 간병을 받다 승하한 곳이기도 하며,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년)화재로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통명전(通明殿)입니다. '통달하여 밝다'는 의미를 지닌 건물로, 내전(內殿)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하여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내전의 으뜸 전각이라고 합니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박석을 깔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습니다. 1694년 (숙종 20년)에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神堂)을 차리고 이곳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고 하지요.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됩니다.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33년)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열천(
泉)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지요. 洌(렬)이라는 한자는 '맑다'는 의미이고 冽(렬)이라는 한자는 '차다'는 의미인데, 두음법칙에 의하여 모두 '열'로 표기합니다. 참고로 같은 水변이라 할지라도 (이수변)이 붙은 글자들은 대체로 '차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답니다. 물이 얼게 되면 물방울이 덜 튀어서 氵(삼수변)이 아니라 (이수변)을 쓰는지도 모르지요. 

 

 

 자, 이번에는 환경전(歡慶殿)입니다.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의미의 건물로, 세자나 임금이 생활하기도 했으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건물은 성종 때 지어졌으나 화재로 여러 차례 중건되었으며, 1834년(순조 34년)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건물 이름과는 달리 빈전(殯殿 - 왕 또는 왕비의 사후 관을 모시던 전각)이나 혼전[魂殿 - 왕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동안 신위(神位) 모시던 전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환경전의 추녀 위의 잡상입니다. 

 

 

 이번에는 '햇살이 따뜻한 봄'을 의미하는 경춘전(景春殿)입니다. 1484년(성종 15년)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각 역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지요.
 이곳은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난 곳인 동시에, 성종의 생모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숙종비 인현왕후,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한 곳이라고 합니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다고 하며,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왕비의 처소라 그런지 추녀 위에는 잡상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인을 간직한다'는 의미의 이름이 붙은 함인정(涵仁亭)입니다. 역시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된 건물이지요.
 함인정은 임금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는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친견(親見 - 손윗사람이 직접 봄)하기도 했다지요.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19세기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삼면이 막혀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사진 가운데에 있는 빈양문 오른쪽으로 숭문당(崇文堂)이 보입니다.

 숭문당은 글자 그대로 '문(文)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왕의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영조는 이곳에서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接見 - 신분이 높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찾아온 사람을 만남)하기도 하고, 유생들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숭문당 앞에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버틴다는 주목(朱木)이 아직 살아서 관람객의 주목(注目)을 받고 있습니다. 사진 뒤쪽으로는 서울대병원 건물이 우뚝 서 있어서 또 다른 의미의 주목을 끄는데요, 이러한 고궁 주변에는 건축물의 높이를 제한하는 법적 장치를 진작에 마련해서 미관을 해치는 일이 없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숭문당 주변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함인정과 함께 주목을 담아 봅니다. 저 주목은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보는 이의 주목을 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잎이 저렇게 조금 붙어 있는데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벽돌 담장 너머는 창덕궁 일원입니다. 가을날 오후의 햇살이 느티나무 밑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담벼락 너머로 문정전(文政殿)을 봅니다. 임금이 신하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편전)이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문정전은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라고 하지요. 그 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 글의 맨 위에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었는데요, 이번에도 되묻고 싶습니다. 권력이란 무엇일까요? 권력이 무엇이기에 아들마저 죽인다는 말인지요?

 

 

 이번에는 숭문당과 그 너머로 보이는 함인정을 담아 봅니다.

 

 

 명정전 행랑 남쪽은 지금은 이렇게 빈 터로 남아 있지만 이곳에 세자시강원, 세자익위사를 포함한 동궁 일원이 있었다고 하며, 창덕궁의 낙선재 일대까지 묶어 왕세자의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동궁 근처에 궐내각사가 설치되어 규영신부[奎瀛新府, 또는 주자소(鑄字所) - 활자 제작, 서적 인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 중앙군 지휘, 감독, 궁궐 경비), 내사복시(內司僕寺 - 궁궐 마구간, 말과 수레 관리), 관천대觀天臺 - 천문 관측)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창덕궁의 궐내각사와 마찬가지로 이 근처에도 회화나무가 많이 있는데,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회화나무는 밑동이 갈라져 있습니다. 원래 하나의 나무였는데 갈라졌는지, 아니면 두 나무가 붙었다 갈라진 것인지...... 아마 전자이겠지요.

 

 

 

  이곳은 홍화문 남쪽 선인문(宣人門) 앞입니다. 오래된 회화나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형상으로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가 이 근처로 옮겨진 후 결국 8일만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니, 아마도 저 늙은 회화나무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백당나무의 열매입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떨기나무의 종류로 관상용으로 많이들 심는다고 하지요. 

 

 

 이제 2022년의 가을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은 늘 한결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이라고 하여 그저 무의미하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새로운 의미를 찾아 또다시 하루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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