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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9일, 날씨도 화창한 토요일 오후입니다. 오랜만에 창덕궁(昌德宮)으로 발길을 옮겨 봅니다.
창덕궁은 경복궁(景福宮)의 이궁(離宮)으로 1405년(태종 5년)에 지어진 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에 재건된 후에도 화재로 인하여 여러 차례 개수(改修)와 증축(增築)을 하였다고 하지요.
계유정난[癸酉靖難 - 1453년(단종 1년)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사건, 그로부터 2년 후 수양대군이 조선 7대 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 권좌에 오른 세조가 경복궁에 머물기를 꺼려하여 창덕궁에 거처하기 시작하면서 약 2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경복궁은 주요 건물들을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여 왕의 권위를 잘 나타내는 반면, 창덕궁은 응봉산 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비정형적인 조형미를 잘 나타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전각들이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점, 한국적 정서가 잘 담겨 있다는 점 등을 높게 평가 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하지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후원은 예약이 마감되어 오늘은 입장할 수 없었지요. 볕 좋은 가을날, 붐비는 인파 속에서 앵글에 사람들이 담기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며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12년이나 묵은 DSLR 카메라가 수시로 작동을 멈춰 전원을 껐다 켜기를 반복하며 어렵게 촬영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초점거리 24mm로 촬영하였으나 크롭바디의 한계로 인해 안타깝게도 추녀 일부가 잘리고 말았습니다. 도로 건너편에서 온전한 돈화문의 모습을 담아보기도 했지만, 돈화문의 정면을 촬영하기가 어려웠고 또한 도로를 꽉 채운 자동차들로 인하여 원하는 이미지를 얻지 못했지요.
창덕궁 바로 앞에 종묘가 자리하기에 돈화문을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고 합니다. 1412년(태종 12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정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고 하지요.
임금의 행차와 같은 의례 때 출입문으로 사용하였고, 신하들은 돈화문 서쪽에 따로 설치된 금호문(金虎門)으로 출입하였다고 합니다.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설치하여 통행금지를 알리는 시각에는 종(人定 인경 또는 인정)을 울리고,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시간에는 북(罷漏 파루)을 쳤다고 하지요. 돈화문은 보물 제 3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돈화문 옆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기 위해 30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돈화문 추녀와 가을 빛으로 물들어가는 회화나무를 사진으로 담아 봅니다.
매표소 옆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멋진 모습으로 서 있었지만,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사진을 찍으려다 보니 거대한 은행나무의 밑동이 잘려나갔습니다.
드디어 돈화문을 통해 창덕궁 안으로 입장했습니다. 단풍은 이미 절정의 상태가 지난 것으로 보입니다.
돈화문과 궐내각사 사이 공간에 자리잡은 회화나무 8그루는 수령이 300~400년으로 추정되며 일괄적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모여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외에도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가 사는 마을에 회화나무를 심는 사례가 많아서 회화나무를 일명 '학자나무'라고도 한다지요.
사진 뒤쪽에 살짝 보이는 건물들이 바로 궐내각사(闕內各司)입니다. 궐내각사에는 왕을 보좌하거나 왕실 업무와 직접 관계된 관청들이 설치되었는데, 창덕궁의 경우 내의원(內醫院 - 궁중의 의약 담당), 약방[藥房 - 내의원 어의(御醫)가 근무], 홍문관[弘文館, 또는 옥당(玉堂) -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 왕의 학문적 자문], 예문관(藝文館 - 왕의 말과 명령을 문서로 작성), 승정원(承政院 - 왕명 출납), 규장각(奎章閣 - 왕실 도서관, 학술 및 정책 자문), 검서청[檢書廳 - 규장각의 업무를 보조하는 검서관(檢書官)들이 근무], 봉모당[奉謨堂 - 역대 왕과 신하들이 논의한 것을 적은 글인 모훈(謨訓)을 보관), 사옹원(司饔院 - 대궐의 음식 관장) 등이 있었다고 하네요.
조선의 궁궐들에 설치된 석교(石橋)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금천교(錦川橋) 너머로 진선문(進善門)이 보입니다. 금천교는 측면에서 보면 두개의 아치 형태로 되어 있어 구조적 안정감을 주면서도 외적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멋진 돌다리이지만 오늘은 미처 사진에 담지 못했네요. 금천교는 보물 제 1762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9>에서 뼈아픈 지적을 합니다. 1902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사진에 보이는 진선문과 일직선을 이루게 금천교를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나중에 복원 공사를 하면서 금천과 직각을 이루게 다리를 배치하여 뭔가 삐뚜름한 느낌을 주어 궁궐의 정연함을 망가뜨려 놓았다는 것이지요. 아래 사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선문(進善門)은 금천교를 건너는 관리들이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선하고 청렴한 마음으로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백성을 먹여 살리고 보살피겠다는 고귀한 뜻을 품고 글 공부를 하던 올곧은 선비가 막상 출사(出仕 - 벼슬아치가 되어 세상에 나아감)한 이후, 차츰 부정한 권력의 달콤한 맛을 알게 되어 백성의 안위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에만 매몰되는 '삐뚜름한' 상황을 경계하고자하는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비록 현재의 진선문과 금천교는 삐뚜름하게 배치되어 있지만 말이지요.
금천교를 건넌 후 진선문 앞에서 다시 돈화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완연한 가을빛이 가득합니다. 무수한 인파 위로 각도를 조금만 높여 보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은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거나 눈높이를 달리해 본다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인정전(仁政殿)의 정문인 인정문(仁政門)입니다. 보물 제 81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입니다. 2단의 월대 위에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웅장하고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박해 보인다고 합니다. 경복궁 근정전은 그야말로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지요.
1405년(태종 5년)에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년)에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년)에 재건하였으나, 1803년(순조 3년) 소실되어 1804년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고 합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지요.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고궁에 오면 위와 같은 회랑(回廊) 공간에서 멋스러움을 한가득 느낍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이 아무도 없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꽤나 긴 시간을 기다렸지요. 텅 빈 회랑에 사선으로 비치는 가을 햇살이 명암의 대비를 만들어 냅니다. 그 옛날, 궁궐의 관원과 내관, 궁녀들이 오갔을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박석(薄石)이 깔린 인정전 앞마당의 품계석(品階石)에도 눈길이 갑니다.
국청(鞫廳 - 중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죄를 추궁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특별재판기구)에서 임금이 직접 죄인을 신문(訊問)하는 것을 '친국(親鞠)'이라 하는데, 창덕궁에서는 이곳 숙장문(肅章門) 근처에서 친국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주리를 틀거나 인두로 지지는 등의 잔인한 추국(推鞠)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사의 기로에 섰을지 상상해 봅니다.
숙장문을 지난 후 뒤돌아 서서 인정전 지붕을 봅니다. 사진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하려다 보니 시선이 자꾸 위를 향하게 됩니다.
창덕궁 내에서 유일한 청기와 건물인 선정전(宣政殿) 입니다. 보물 제 81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임금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조정회의, 각종 업무보고, 경연(經筵 - 왕에게 유학 경서를 강론하는 일종의 국정 세미나) 등이 열렸다고 합니다.
창덕궁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 했는데, 1461년(세조 7년)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지요. 어이구, 어린 조카(단종)에게나 사랑을 좀 베풀 것이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희정당(熙政堂)입니다. 희정(熙政)은 '화평하고 즐거운 정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지요. 보물 제 8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기도 하고 또 종종 혼전(魂殿 - 왕, 왕비의 장례 후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곳)으로 쓰이면서, 침전(寢殿)이었던 희정당이 나중에는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하네요.
희정당 누마루 지붕 위의 잡상을 담아 봅니다.
측면에서 본 희정당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인 전통 한옥의 단순한 구조와 다르게 오밀조밀하면서도 복잡한 구조가 사뭇 이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희정당 팔작지붕의 측면 장식도 궁궐 건물답게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희정당의 출입구 한가운데에는 이화(李花) 문양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 문양이 이곳에 있는 까닭은 이 건물이 1920년에 복구된 건물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요.
희정당 앞 넓은 뜰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늙은 소나무를 가을날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으로 사용된 성정각(誠正閣) 일원 뒤편에도 가을 냄새가 흠뻑 묻어 있습니다.
이제 낙선재(樂善齋) 일원으로 발길을 옮겨 봅니다.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憲宗)은 후사를 잇기 위해 후궁으로 맞이한 경빈(慶嬪)을 위해 1847년(헌종 13년)에 낙선재를, 이듬해에는 기존에 있던 수강재(壽康齋) 옆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낙선재 일원을 정비하였다고 하네요.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낙선재 일원은 구중궁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네요. 헌종은 평소 검소한 성품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러한 면모가 반영되어 낙선재 일원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석복헌에서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고종황제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돌아온 후 1962년부터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수강재에서 지냈다고 하지요.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따지고 보면 올케와 시누이 관계인데 말년에는 같은 공간에서 지내다 같은 해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것도 이채롭습니다.
낙선재의 조촐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입니다. 보물 제 176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낙선재 행랑채(?)의 문살입니다.
낙선재의 담장 너머로 석복헌의 굴뚝이 보입니다. 하늘과 석복헌 지붕과 벽돌 굴뚝과 담장의 기와와 벌집 문양이 아름답습니다.
낙선재 후원입니다. 낙선재의 소박함과는 달리 후원은 비교적 예쁘게 꾸며져 있습니다. 꽃 피는 화창한 봄날의 풍광이 기대됩니다.
낙선재 후원에 설치된 굴뚝입니다.
이곳이 헌종의 후궁 경빈(慶嬪)이 기거했던 곳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던 석복헌(錫福軒)입니다. 기품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역시 소박해 보이지요.
이 건물은 수강재(壽康齋)이며, 헌종 당시의 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가 지냈던 곳입니다. 또한 1962년부터 1989년까지 덕혜옹주가 지냈던 곳이기도 하지요.
2시간 동안의 전각 구경을 마치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금천교 난간의 네 귀퉁이에 냉큼 올라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짓궂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석수(石獸)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봅니다.
옳고 그름[是非]과 선악을 판단할 줄 안다는 전설 속의 동물로 궁궐이나 사찰에 사자의 형태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조각물을 '해타(海駝)'라고 합니다. '해타'에 주격조사 '이'가 결합하여 '해태'로 굳어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궁궐에 해태 조각상을 설치하는 것은 왕권의 위엄을 드러냄과 동시에 왕권 수호의 의미를 나타낸다고도 하지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조각상도 '해태'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9>에 따르면, 창덕궁 금천교에 설치된 이 조각상은 '어떤 동물도 마주치기만 하면 도망치고 만다는 전설 속 백수(百獸)의 왕인 산예(狻猊)'를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산예는 대개 사자 모양으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아울러 유홍준 교수는 이 조각상에 대하여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니라 개구쟁이같이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어 민예조각을 보는 듯 친숙'하며, '의관을 단정하게 갖춘 양반이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 머쓱하게 웃고 있는 것 같은 해학'이 느껴진다고 표현했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게 보입니다. '산예(狻猊)'의 '狻' 자와 '猊' 자는 모두 '사자'라는 뜻을 지닌 한자이지요.
막연하게 '해태'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유홍준 교수의 글을 통해 '산예(狻猊)'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금천교 상류 방향 교각 밑에 자리잡은 거북상 등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소원을 빌며 던져 놓은 동전들이 가득합니다.
이상으로 가을날 토요일 오후, 사람들로 붐비는 창덕궁의 이런저런 모습을 옮겨 보았습니다.
[창덕궁의 전각 관련 내용은 창덕궁 홈페이지의 전각 소개 자료를 중심으로 수정 및 보완을 거쳐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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