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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주방장은 쓴다 / 이영재

꿈꾸는 무인도 2015. 9. 18. 12:32

   주방장은 쓴다

 

  눈은 이미 내렸다 새가 날아온다 그리고 새는 날아간다 이곳에서 시가 시작되는 건 아니다

 

  세상엔 먹을 것이 참 없다 먹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 생각까지 했을까

 

  허기가 시보다 나은 점이라면 녀석은 문을 두드릴 줄 안다는 것 요리는 곧 완성된다 완성되기 전에 이 깨끗한 접시를 쓰레기통으로 던질 수 있을까

 

  내 몸에겐 건강한 학대가 필요하고, 다행히 이곳은 학대에 매우 알맞다 떠나는 새조차 둥지를 훌륭하게 지을 줄 안다

 

  시를 포기하고 시인이 된다는 건 멋진 일이다 더 멋진 건, 죽어서 시인이 되는 일

 

  거짓이다 누구도 시인이 될 수 없고 되어선 안 된다 담배를 문 주방장만이 오래도록 써왔을 뿐이다

 

  휘파람이 휘파람을 불 생각이 없듯 우체통은 붉을 필요가 없다 다행히 라면집은 가끔만 문을 연다

 

  요리는 완성될 필요가 없다 이 깨끗한 접시를 온전하게 버리기 위해

 

  철새가 돌아올 둥지를 삶아 먹고 이사를 할 것이다 겨울과 더 가까운 곳에 주방을 열고 문을 닫을 것이다 어디서든, 시작하지 않기 위해

 

  거짓인 명제가 가득한 접시 위에만

  쓴다

 

     - 이영재, 2014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사진 : 양평 미리내 힐빙클럽, 201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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