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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비 오는 사막 / 유하

꿈꾸는 무인도 2015. 9. 15. 11:20

   비 오는 사막

 

  새벽 한 시, 속초 大浦(대포)에서 바라보는

  동해 바다는 잠든 사막 같다

  흐르는 물과 하늘의 뒤범벅 속에서

  오징어잡이 배만 온통 유전의 불빛처럼 반짝이고

  다가가는 모든 것들을 가로 눕게 만드는

  저 노회한 수평선

  마른 오징어를 질겅거리면,

  길게 아픈 추억들에 구멍이 뚫려

  밤바다가 통째로 씹힌다

 

  사라져 간 날들이여

  난 무엇을 얻으려 여기까지 왔는가

  지금 내 손에 쥐어진 건

  파도가 남긴 포말의 싸늘한 촉감뿐

  멀리 일직선으로 내려꽂히는 번개가

  바다의 정수리를 쪼갠다

  후두둑 후회처럼 쏟아지는 소낙비

  내 머리 속 오징어떼 울부짖고

  천길 심연 속에 깃든 이 물컹한 삶의 호흡들

  비린내를 풍기며

  엄습해 오는 그물의 세월아,

  다 건져가라 건져가라

 

  고통이 고통에게 손을 내밀 듯

  바다는 빗줄기를 맞이하고,

  마음이 끝내 쓰라린 소금기를 남기는 곳에서

  나는 본다, 입을 쩍 벌린 채

  허공에 매달린 내 육신의 건어물을

 

   - 유하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1993)

 

 

  (사진 : 양양 하조대, 201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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