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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의 초상2

정동길 둘러보기

꿈꾸는 무인도 2015. 10. 16. 12:38

 우리 일행은 덕수궁에서 나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가을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지고, 해설사는 멋드러진 강의를 쏟아냅니다.

 

 

 

 이어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봅니다. 아이들은 열변을 토하는 해설사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앗! 다 그런 것은 아니군요. 해설사의 강의보다 사진을 찍는 선생님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진이 남게 되었습니다. 녀석들이 이 글을 보고 뭐라 그럴까봐 얼굴을 약간 가려 주는 센스를 발휘합니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은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1885년(고종 12년)에 설립한 근대적 사학(私學)입니다.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입국하여 그보다 먼저 와 있던 스크랜튼(Scranton,W.B) 여사의 집 한 채를 산 다음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8월 3일부터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상대로 수업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의  공사(公使) 조지 폴크(Georg C. Foulk)는 고종(高宗)에게 아펜젤러가 영어학교를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아뢰었으며, 이에 고종은  학교 사업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고종은 1886년 6월 8일에 인재를 배양한다는 의미의 ‘배재학당’이라는 교명(校名)과 편액(扁額)을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개교 정황에 대해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일종의 전초전(前哨戰) 모양으로 우리의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 버리고, 또 하나는 6월은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 버렸으며, 또 다른 학생은 가족에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이들의 빈 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그 일부가 채워졌다. 10월 6일인 지금은 재학생이 20명이요, 실제 출석하고 있는 학생 수는 18명이다.”

 이렇게 출발한 배재학당은, 날로 늘어가는 학생을 수용하기 위하여 큰 교사(校舍)가 필요했는데, 1887년에 미국인들의 후원으로 르네상스식 벽돌 건물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후 건물이 소실되어 1916년 3월에 다시 지은 것이 바로 지금 보이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건물인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종교행사를 갖기도 하였으나, 1887년 9월에 전적으로 예배만을 볼 수 있도록 별도의 건물을 구입해 수리하여 <벧엘예배당(Bethel Chapel)>이라 이름을 짓습니다. 그 후 1897년 12월 26일에 예배당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지요. 한국전쟁 때 파손된 것을 수리하기는 했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의 개신교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1918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었다고도 하지요. 지금은 <정동제일교회>의 부속 건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1980년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라는 노래도 이곳을 배경으로 하였다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잠시 교회 건물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벧엘예배당 뒤로 새 교회 건물을 지어 놓았습니다.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 벽에 담쟁이가 기어올라 운치를 자아냅니다.

 

 

 벧엘예배당의 종탑이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굴뚝과 지붕의 선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십자가가 가장 높은 것은 아닌가 봅니다. 십자가 위에는 피뢰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정동극장을 지나 중명전(重明殿)으로 향합니다. 중명전은 '광명이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전각'이라는 의미로,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된 건물입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漱玉軒)’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 용도로 사용하였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건물의 설계는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고 합니다.
 중명전은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현장이기도 합니다.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의 대화재 이후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에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지요. 한편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해방 후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英親王 : 1897~1970)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고 하지요.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으며,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으로 관리 전환되어, 2007년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면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고 합니다.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위 사진은 이화여자고등학교 내의 <이화박물관> 건물입니다.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Scranton.M.F.) 부인이 1886년 5월 경부터 이곳에서 여학생 한 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887년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이화학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화학당은 한국의 근대 여성교육의 효시이자 요람 역할을 하며 많은 여성 인재를 길러 낸 곳이기도 하지요. 

 

 

 수능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도 저곳에 있군요. 저런......

 

 

 위 사진에 보이는 탑은 옛 러시아공사관의 종탑입니다. 아관파천의 현장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건물은 없어지고 종탑만 덜렁 남아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옛 러시아공사관 터에서 본 남산의 모습입니다.

 

 휴일인 한글날에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둘러보며 우리의 근대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동행한 학생들에게도 값어치 있는 좋은 추억이 되었기를 바라며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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