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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삶이
절망이라고 치욕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시름이라고만
말할 수 있어도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순하게 시름처름 아득하게
깊어질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천천히 해가 뜨고 시름처럼
하염없이 늙어가는 나무 아래선
펄펄 끓는 치욕을 퍼먹어도 좋으리
노란 평상 위에서 온갖 웬수들 다 모여
숟가락 부딪치며 밥 먹어도 좋으리
그때 머리 위로는 한때 狂暴(광폭)했던 바람이
넓적한 그림자를 흔들며 가도 좋으리
시름처럼 수굿한 구름이 나무 꼭대기에서
집적대도 좋으리
그래
끝이라고 문 닫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시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따뜻하게
시름처럼 축축하게 한시절
뒹굴뒹굴 보낸다면 얼마나 좋으리
시름의 방 속에서 어른거리는 것들의
그림자를 보는 일도 좋으리
문밖에서 휙 지나가는 도둑고양이 같은 시름들
못 본 척하는 일도 좋으리
풀섶에서 눈 번득이는 작은 짐승처럼
그저 고요히 두근거리는 일도 좋으리
그 또한 시름 같은 것
- 이경림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창작과비평사, 1997)
(사진 : 철원 도피안사, 2015.05.25)
'시름'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걸려 풀리지 않는 근심이나 걱정'입니다. 아무리 좋게 받아들이려 해도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될 수밖에 없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삶에서 시름이란 없어야 좋은 것이지요. 그렇지만 과연 시름없는 삶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시인은 오히려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시름을 긍정하려 합니다. 시름을 순하고 아득하게 깊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문밖에서 휙 지나가는 도둑고양이처럼 그저 못 본 척하거나, 고요히 두근거리는 그 무엇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세속의 말처럼 말이지요. 그래도 절망이나 치욕보다는 시름이 자아내는 이미지가 훨씬 부드럽고 인간적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름없는 삶이 있을 수 없다면, 시름을 기꺼운 마음으로 안고 살아가면 그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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