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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仁 지나는 길에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可口可樂 물냄새.
구국 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 민영 <龍仁 지나는 길에> (창작과비평사, 1977)
화자는 용인 지나는 길에 산등성이에 피어 있는 산벚꽃을 보면서 '도피안사에 무리지던 / 연분홍빛 꽃 너울'을 떠올립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철원에서의 기억은 결코 아름다움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요. '피안의 세계에 다다른 절'인 도피안사를 곁에 두고 살았어도 '먹어도 허기지던' 보릿고개를 힘겹게 보냈던 아픔만 가득합니다. 그렇다고 고향을 떠난 현재의 상황이 더 나아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힘겨운 객지 생활을 하면서 '지친 몸을 쉴' 안락한 공간조차 마땅치 않습니다. 그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서 지친 몸을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며 힘들더라도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다급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입을 즐겁게 하는 코카콜라(可口可樂)의 달콤한 맛도 화자에게는 역겹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어쩌면 서구의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코카콜라에 대한 화자의 반감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구국구국' 울어대는 산비둘기의 울음소리는 그저 단순한 의성어가 아니라 '救國救國'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용인은 명당 터로 이름났지요. 그래서 화자는 용인 땅을 지나면서 산벚꽃 핀 산자락에 '뼈를 묻을' 생각까지도 합니다. 이왕이면 산벚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용인의 산자락에 말이지요. 그렇지만 화자는 '소태같이 쓴 입술'로 풀잎을 질근질근 씹으며 고달픈 삶의 서글픔을 속으로 삭입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묵묵히 견딜 뿐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던 때는 20대 중반, 대학을 갓 졸업하고 서울 한복판에서 군 복무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민영의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는 1977년 8월 1일에 초판이 나왔는데(창비시선 11), 1990년 12월 20일에 발행된 판본(3판)으로 구입해 읽었지요. 군 생활의 단조로움에서 오는 무력감과 나른한 봄날의 몽롱한 기분에서 오는 왠지 모를 짙은 애상감을 이 시집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털어낼 수 있었던 가물가물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재인폭포에 다녀오던 길, 연천 고문리의 들판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이 옅은 신록빛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봄날 오후의 희끄무레한 햇살을 받으며 군데군데 피어 있는 연분홍빛 산벚꽃을 보는 순간, 오래전에 읽었던 민영의 시가 문득 떠올랐던 것입니다. 잊고 있었던 기억 저 너머에 꼭꼭 숨어 있던 아련한 감성의 한 자락이 살며시 솟아오르는 걸 가슴이 먼저 알아차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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