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나의 간디 / 박라연

꿈꾸는 무인도 2016. 4. 25. 15:38

   나의 간디

 

  그해 겨울

  꽁꽁 얼어 빛나던

  스무 살 간디의 영혼이

  러스킨의 사르보디아를 읽고 있을 때

  한 그루 미류나무에서 자라던 잎새들은

  이발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빛이 되고 어둠이 되어 흔들렸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나의 간디

  키 낮은 주막집 어두운 불빛 아래서

  부른다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빈손으로 귀가하는 젖은 머리 위

  한 떼의 안개로 몰려드는 봄베이의 슬픔

  술기 오른 골목길은 문득 갈대밭이 되고

  먼저 떠난 친구의 혼백이 서 있다 문패처럼

 

  살아서 그대 기다리는 나는

  자다가도 깨어나 전화를 하고

  울리지 않는 벨소리 듣는 밤

  혼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새처럼 높은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

  그대 맑은 영혼을 생각한다

  책으로만 둘러싸인 조그만 방 깊숙이

  노오란 풀씨 한 톨 떨구고 싶던 그날을……

 

  높이 높이 나는 가슴 붉은 지빠귀새

  누군가 비워둔 공중에 다시 모여

  자기들의 나라를 세운다 깃털을 흔들며

  떠돌이 혼백들 몰려와 어깨춤 추고

  상처입은 날개마다 붕대를 푸는

  그날에 나의 간디는 밝은 서재에 앉아

  절친한 친구와 술내기 바둑을 두고

  저문 강 어귀에서 산모퉁이에서

  만난다 깃동잠자리와 배추흰나비를

  갇혀서 더욱 자유로웠던 그날을.

 

    -  박라연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 1990)

 

 

  (사진 : 양주 삼숭동 들판 위를 나는 백로, 2016.02.09) 

 

 영혼이 맑은 사람......

 그런 사람을 그리워했던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자 했던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늘은 미세먼지로 희뿌옇게 뒤덮여 있어도

 가슴 부풀어 오르는 설렘으로 온몸이 휘청거렸던 

 어떤 봄날의 나른한 오후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