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릉 소나무숲 / 조용미
흥덕왕릉 소나무숲
빛과 어둠의 경계가 너무 커 소름이 돋는다 하늘을 다 가려버린 노송들 아래 찬바람만 빈자리를 드나들고 있는 소나무숲엔 버섯조차 자라지 않는다 새들도 이곳을 쉽사리 들여다볼 수 없다 한줄기 햇살의 틈입도 허락하지 않는 곳, 짙은 그늘 아래 얼마나 오래 굳어 있었을까 언제 꽃과 풀들을 피워보기라도 한 것일까 흙은 단단한 바위처럼 누워 있다
꿈틀꿈틀, 빛을 향한 욕망이 소나무의 몸을 온통 뒤틀리게 했다 불길을 피해 몸을 트는 화형장의 마녀의 몸부림이 저러했을까 감출 수 없는 욕망의 흔적으로 가득한 이곳을 연옥이라 부르고 싶다 계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가지 풍경만을 가지고 있는 곳엔 시간도 멈추어버린 지 오래, 빛을 향한 마음이 하늘에 닿는 곳 욕망의 끝간데 없는 거기, 소나무가 가장 높이 뻗어올린 가지 끝 그곳에 빛의 폭포가 쏟아진다
소나무숲 아래를 감도는 찬바람은 아마도 내게 홍덕왕릉이 이곳에 있게 된 사연을 말해주고 싶어하는 눈치다 길 가는 사람의 궁금증을 다 풀어주기엔 시간의 올을 너무 많이 풀어내야 하는 것일까 저 오래된 소나무들은 그걸 알고 있다
뒤틀린 나뭇가지들의 아우성과 한없이 솟아오르려는 나무의 힘이 동떨어진 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그곳엔 시간을 거역하는 서늘함만이 왕릉의 입구를 지키고 있다
- 조용미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창작과비평사, 2000)
(사진 : 강원도 양양, 2015.01.30)
흥덕왕릉 소나무 숲은 사진 찍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구불구불한 노송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풍경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지요.
시인은 빽빽한 소나무 숲을 '계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가지 풍경만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그리고 '시간도 멈추어버린 지 오래'된 곳으로, 무성한 소나무 가지를 비집고 새어들어오는 햇빛의 신비로운 모습을 '소나무가 가장 높이 뻗어올린 가지 끝 그곳에 빛의 폭포가 쏟아진다'라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흥덕왕릉 소나무숲을 뭔가 세월 깊은 비밀이라도 간직한 은밀한 곳으로 인식합니다. '뒤틀린 나뭇가지들의 아우성과 한없이 솟아오르려는 나무의 힘이 동떨어진 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소나무 숲에는 '시간을 거역하는 서늘함'만이 존재할 따름이며, 숲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용인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흥덕왕릉의 소나무 숲은 더욱 신비롭게만 느껴집니다. 올 겨울 방학엔 식구들과 함께 꼭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참고로, 흥덕왕(興德王)은 신라 제42대 왕(재위: 826∼836년)으로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으며, 특히 골품제(骨品制) 규정을 한층 강화하여 복색(服色-옷의 색과 장식), 거기(車騎-말이나 수레의 장식이나 재질), 기용(器用-일상 생활에 필요한 각종 그릇), 옥사(屋舍-건물의 길이나 넓이) 등에 대한 규격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김헌창(金憲昌)의 난(亂)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의 후손들을 우대해 주었고, 청해진(淸海鎭)과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적의 침탈을 막는 등 내치의 안정에 힘쓴 왕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