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 조용미
저수지
논을 가로질러 선산에 오르려면 그곳을 꼭 지나쳐야 한다
그곳은 파다 만 우물 같은 저수지
아버지 저만치 앞서 가시고 동생도 뒤따라가고
논둑길 걷다 보면 어두운 초록빛 물은 그곳이 길의 다른 입구라고 속삭인다
움푹한 어둠이 입 벌리고 있는 곳,
어디까지 파 내려갔을까 깊은 웅덩이는 어느새 하늘과 산과 나의 고개 숙인 얼굴을 거꾸로 붙들고 있다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 있다
장대로 그 속을 찔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젠가 눈동자를 반으로 가르고 그 속에 사람이 풍덩 뛰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그를 다시 게워냈다
치마를 뒤집어쓴 젊은 여자도 물가 고무신 곁으로 조용히 데려다놓았다고 한다
동생도 아버지도 벌써 보이지 않는데, 아버지는 이쯤에서 항상 나를 부르신다
물의 검은 입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그 속을 기웃거리던 나는 대답 대신 머리를 빼낸다
아무도 그 속에 들어가보지 못했다
몇년 뒤, 저 속에 들어가 시퍼런 물에 썩지도 않고 눈뜨고 있는 사람
그는 무엇을 보게 될까 비밀을 보아버린 사람은 항상
죽은 자이다 그리고 침묵만이 오래 그들의 몫이 된다
산소에 오르려면 늘 그곳을 지나쳐야 한다
- 조용미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창작과비평사, 2000)
(사진 : 강원도 양양, 2015.05.02)
화자는 죽은 자가 묻혀 있는 산소로 가는 길에서 '죽음'의 원형 상징으로서의 물(저수지)이 이끄는 강력한 마성(魔性)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끝 모를 호기심을 유발하는 '파다 만 우물 같은' 저수지,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을 것만 같은 '움푹한 어둠이 입 벌리고 있는' 저수지, 그 속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저수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비밀을 보아버린 사람은 항상 죽은 자'이며, 그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자는 '어두운 초록빛 물'이 어쩌면 죽은 자가 묻혀 있는 산소로 가는 '길의 다른 입구'일지 모른다며 깊은 물속을 응시합니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로 가는 길에서 또 다른 죽음의 입구가 숙명처럼 마음을 이끕니다. 저수지는 화자를 붙들고 쉬이 놓아주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의 입구로 머리를 들여놓는 바로 그 순간, 산 자들의 세계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릅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때로는 동생의 목소리로......
죽음의 공간은 그 누구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은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에, 늘 삶의 공간보다 끌림의 정도가 크게 느껴집니다. 특히 삶이 힘들고 고단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렇지만 보다 냉철하게 생각해 본다면, 삶에 대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것은 극히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간이 간직한 어두운 비밀보다, 삶의 공간이 품고 있는 비밀은 훨씬 풍성하고 대채로우며 따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성과도 같은 '길의 다른 입구'를 의연하게 외면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삶의 비밀이란 것에 대해 넘쳐흐를 정도로 충분히 알 만큼 안 다음에 '길의 다른 입구'에 서서히 관심을 가져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