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덕수궁 돌담길 / 최영미
꿈꾸는 무인도
2015. 10. 23. 08:42
덕수궁 돌담길
소풍 나온 처녀애들 싱싱한 허벅지 위에
맥고모 쓴 노인의 누런 막대지팡이 위에
평등하게 부서지는 햇살
일요일 오후 덕수궁 돌담길에
봄이 오다가 브레이크가 걸렸다
너도 한때 이 길에서 청춘의 꿈들을 주워올렸지
뗐다 붙였다 네 멋대로 모자이크했었지
어떤 잔인한 세월들이
이 봄을 밟고 갔던가
얼마나 많은 봄들이
이 길에서 피기도 전에 스러졌던가
우리가 버린 꿈의 조각들이,
버렸다 애써 다시 기운 희망들이
일요일 오후 덕수궁 돌담길에서
휘청거리며 빛나고 있다
- 최영미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사, 1998)
(사진 : 덕수궁 담장, 2015.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