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미안하다 / 정호승

꿈꾸는 무인도 2015. 5. 12. 20:07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 비평사, 1997)

 

 

  (사진 : 강원도 양양, 2015.01.28)

 

 

봄의 끝자락, 비 내리는 밤이 있었다.

교사용 책상에 앉아 치명적인 허허로움의 늪에서 버둥거릴 때가 있었다.

가는 봄을 달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 어느 날이 있었다.

느닷없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고3 교실을 가득 채운 때가 있었다.

거대한 맹꽁이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적막을 깨는 그런 밤이 있었다.

딱딱한 교실 의자에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푸는 녀석들이 있었다.

미안하다.

그래, 너희들을 사랑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