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최승자

꿈꾸는 무인도 2015. 5. 12. 15:50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 최승자 <즐거운 日記> (문학과지성사, 1984)

 

 

  (사진 : 2012.05.08, 양주 덕정동)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시입니다. 누구나 삶이 '콘크리트 벽'처럼 구체적이고 명료하기를 바라지만, 그건 그렇게 쉽지 않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상과도 같은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고 말지요. 그러나 시인은, 사랑이라는 것을 비유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닭고기를 씹는' 일처럼 생생하고 분명한 그 무엇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이 떠나간다고 할지라도 미련 없이 보내주고, 다만 '살아, 기다리는' 행위로 그 사랑을 이루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온몸을 던져 사랑을 완성하려는 적극적인 인식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결코 보편적이지 않게 인식하고 표현하여, 1980년대라는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