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최영미

꿈꾸는 무인도 2015. 4. 29. 14:36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 끝의 허망한 한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성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부치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4)

  

    * 원문에는 '한귀퉁은'과 '벗어붙이고'로 되어 있음

 

  (사진 : 한계령, 2012.02.03)

 

 최영미의 시를 오랜만에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젊은 지식인들의 좌절과 방황의 모습을 대범하면서도 과감한 시어를 사용하여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소련의 해체와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 테마는 90년대를 살아가는 의식 있는 젊은이들의 길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사회 변혁에 대한 강력한 동기부여가 사라지게 됨으로써 깊은 고뇌 속으로 침잠하게 되었고, 끝을 알 수 없는 뼈저린 자기 반성의 시간 속에서 심리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지요. 요즘 젊은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어미 잃은 어린 새들의 모습이 그럴까요? 냉전 시대의 종말이 오고, 세계화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휘몰아치게 됨으로써 사회 변혁을 꿈꾸던 순수한 젊은 열정은 어떻게 보면 한낱 잊힌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청년 지식인들은 엄청나게 큰 아픔과 상처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작품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시인의 통한이 서린 내적 방황과 존재론적 고민을 거침없는 시어를 통해 솔직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