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鳥葬) / 김선태
鳥葬(조장)
티베트의 드넓은 평원에 가서
한 사십 대 여인의 조장을 지켜보았다.
라마승이 내장을 꺼내어 언저리에 뿌리자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달겨들더니 삽시에
머리카락과 앙상한 뼈만 남았다, 다시
쇠망치로 뼈를 잘게 부수어 밀보리와 반죽한 것을
독수리들이 깨끗이 먹어치웠다, 잠깐이었다.
포식한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의식은 끝났다, 그렇게 여인은 허, 공에 묻혔다
독수리의 몸은 무덤이었다 여인의
영혼은 무거운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로 돌아갔다, 독수리의 날개를 빌어 타고
처음으로 하늘을 훨훨 날을 수 있었을 게다.
장례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유족들은
울지 않았다, 침울하지도 않았다, 평온했다
대퇴골로 피리를 만들어 불던 스님의 표정도
시종 경건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생전 못된 놈의 시신은 독수리들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슬퍼한다고 했다.
언덕길을 내려오다 들꽃 한 송이를 보며
문득 죽은 여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평원의 풀과 나무들도, 모래알도, 독수리도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어귀에는 꾀죄죄한 소년들이 어김없이
허리를 굽히며 간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가까웠다.
- 현대시학, 2006년 4월호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혐오감을 느꼈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죽음'과 그에 따른 의식은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므로, 무섭지만 결코 무섭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죽음에 뒤따르는 장례 절차는, 그것이 화장(火葬)이든, 매장(埋葬)이든, 풍장(風葬)이든, 조장(鳥葬)이든, 수목장(樹木葬)이든, 또 어떤 장(葬)이든 그러한 의식을 통해 영혼을 자유롭게 보내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터...... 특히 조장을 통해 고인의 이승에서의 삶이 누더기와 같은 육신의 굴레를 벗어나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승화된다는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랴!
'삶과 죽음은 이토록 가깝'기만 하고, 죽음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얻는다고 한다면 죽음은 결코 두렵거나 무섭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만 남겨진 인연들이 아파할 테지만, 그것은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일뿐, 저쪽 세상으로 떠난 자의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니 형식을 떠나서 모든 장례 의식은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닌 숭고함 그 자체이리라.
(해변의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고요히 앉아 있는 갈매기는 조장(鳥葬)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조장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을 얻는다는 티베트인들의 세계관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독수리면 어떻고 갈매기면 어떻겠는가? 예전에 낙산 바닷가에서 본 갈매기의 처연한 눈빛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는 탓인지, 제대로 된 독수리 사진을 찍지 못한 탓인지 굳이 핑계 삼고 싶지 않을 뿐이거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