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생밤 까주는 사람 / 박라연

꿈꾸는 무인도 2020. 3. 27. 12:52

   생밤 까주는 사람

 

  이 사람아

  산 채로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한번 더 벗겨내고

  그리고 새하얀 알몸으로 자네에게 가네

  이 사람아

  세상이 나를 제아무리 깊게 벗겨놓아도

  결코 쪽밤은 아니라네

  그곳에서 돌아온 나는

  깜깜 어둠 속에서도 알밤인 나는

  자네 입술에서 다시 한번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이 될 것이네

 

    - 박라연 <생밤 까주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1993)

 

(사진 : 강원도 양양, 2016.09.16)

 

 생밤의 껍질을 벗겨 봐야 '알밤'인지 '쪽밤'인지 알 수 있다.

 혹여 쪽밤인들 어떠랴? '세상이 나를 제아무리 깊게 벗겨놓아도' 쪽밤도 알밤도 다 밤인 것을.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삶이라 할지라도 가을이 깊어가면 결국 어떻게든 밤이 될 놈은 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