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萬然寺의 백일홍 / 박라연

꿈꾸는 무인도 2020. 3. 26. 21:37

    萬然寺의 백일홍 

 

  단번에 눈치챌 수는 없다

  만연사의 백일홍 그 여름의 신비를

  한 생애의 비가 세상 지붕을 적실 때

  너무 깊은 뿌리까지 적실 때

  그때에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백제의 앞마당에 서서

  음양처럼 마주보고 서서

  여느 백일홍처럼 온몸에 붉은 꽃잎을 매달지만

  그냥 꽃잎이라 부를 수는 없다

  부처의 또 다른 분신인 양

  수천 수만 맑게 뜬 꽃잎들의 눈이

  나를 부르르 떨게 한다

  벌에 쏘이듯 만연사의 백일홍

  수천의 꽃잎들이 내 온몸을 쏘아댄다

  퉁퉁 부어올라 영혼까지 부어올라

  내 이름마저 잊을 때

  그때에 소름 돋듯 돋아나줄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라도 그 무엇이라도 되면서

  살아가자며 백일홍 붉은 꽃잎들이

  나를 일으켜세울지도 모른다

 

       - 박라연 <생밤 까주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1993)

 

   (사진 :  블로그 'VIEW / 세상을 보다'에서 옮김)

 

 

 슬프다.

 '한 생애의 비가 세상 지붕'을 적시고 있어서 슬픈 것만이 아니다. 그저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아픔처럼 마냥 슬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말도 생각이 나지만, 그래도 어찌할 수가 없다.

 이미 충분히 자제하고 있던 슬픔과 분노가 '내 온몸을 쏘아'대고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수천 수만'의 '맑게 뜬 꽃잎들'이 '나를 부르르 떨게' 하는 만연사의 백일홍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러면 슬픔으로 주저앉은 나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만연사에 백일홍이 만개하는 여름이 과연 오기는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