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의 여름 #03 절집 구경
이제 본격적으로 봉선사 전각들과 주변 풍경을 담아 봅니다......
봉선사 부도밭을 지나 몇 걸음 옮기면 길 왼쪽에 승과원(僧科園 - 승과평 터)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내용을 옮겨 보겠습니다.
[명종 6년(1551) 봉선사가 교종갑찰(敎宗甲刹)로 특선(特選)되었다. 교종갑찰이란 전국 승려들의 교학(敎學) 능력을 평정(評定)하는 곳으로 일종의 승려들의 과거장(科擧場)이다. 명종 7년(1552) 승과(僧科)가 열리니 서산(西山), 사명(四溟) 같은 고승께서도 응시하였다고 한다. 그간 구전(口傳)되던 과거장, 승과평(僧科坪) 자리를 주변 원지(園池)와 더불어 승과원(僧科園)이라 이름짓고 불기 2553년(2009년) 7월에 이 표석을 세운다.]
승과평 터를 지나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람한 모습으로 길손을 맞이합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도 눈에 들어오지요. 당간지주는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세워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기둥입니다. 봉선사의 당간지주는 다른 절과는 달리 큰 돌 하나를 깎아서 만든 점이 특징이라고 하지요.
당간지주를 지나면 청풍루(淸風樓)가 눈에 들어옵니다. 주련이 한글로 씌어진 점도 시선을 끕니다. 사찰마다 구조는 다를 수 있는데, 여타의 절에서 사천왕문 역할을 하는 곳이 봉선사에서는 바로 청풍루라고 하겠습니다.
[밀적금강((密迹金剛)]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보통 사찰 입구의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습니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지니고 부처를 호위하는 야차신(夜叉神)으로, 부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誓願 - 소원을 이루고자 맹세하는 일)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고 한다고 하며,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力士)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가 된다고 합니다.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頭光)이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단순히 힘만 센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갖추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통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열어 ‘아’ 하고 소리를 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흔히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훔금강역사’라고 하는데, 이때의 ‘아’는 범어(梵語 - 산스크리트어)의 첫째 글자이고, ‘훔’은 끝 글자라고 하지요. 교회 건물에서 그리스 문자의 첫 글자인 '알파(A)'와 끝 글자인 '오메가(Ω)를 사용한 장식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이들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하는 것이며, 흔히 상의를 입지 않고 옷을 허리에 걸친 채 주먹을 쥐고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을 내린 자세를 취하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봉선사에선 사천왕도 조각상이 아닌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하겠지요. 흔히 사천왕상은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잔뜩 치켜올린 검은 눈썹, 크게 벌어진 빨간 입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에, 손에는 칼이나 창, 비파, 여의주 등을 들고, 발은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 때 발 밑에 깔린 마귀들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는 상을 하고 있지요. 원래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사천왕이라 일컫습니다.
청풍루를 지나면 정면으로 큰법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건물은 조선 예종 1년(1469)에 처음 지어졌으며[초창(初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소실되어 1637년에 계민선사(戒敏先師)에 의한 일괄 중수(重修)때 다시 지어졌고[재창(再創)],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탄 것을 운허 스님이 1970년에 다시 지었으며[삼창(三創)], 운허 스님의 뜻에 따라 한글로 '큰법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봉선사 안내판 문구를 임의로 약간 수정하여 '블로그체'로 옮겨 봅니다.
[봉선사(奉先寺)는 고려(高麗) 광종(光宗) 20년(969)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운악산(雲岳山)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雲岳寺)로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남산종(南山宗), 자은종(慈恩宗), 시흥종(始興宗), 중도종(中道宗), 화엄종(華嚴宗),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등 불교의 7개 종파(宗派)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兩宗)으로 통합합니다. 이 때 운악사가 혁파(革罷 - 없어짐)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지요. 그 후 예종(睿宗) 1년(1469)에 정희왕후(貞熹王后) 윤 씨가 남편 세조(世祖)의 능침(陵寢)인 광릉(光陵)을 보호할 목적으로 새롭게 89칸으로 중창(重創)하고 봉선사(奉先寺)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봉선사라는 절 이름은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봉호선왕지릉(奉護先王之陵)]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지요.
봉선사는 명종(明宗) 6년(1551)에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중흥(敎學中興)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대한제국 시절인 고종(高宗) 광무(光武) 6년(고종 40년, 1902)에는 경기도 내의 전 사찰을 관장하기도 했습니다. 1962년에는 전국의 사찰 중 제25교구(敎區)의 본사(本寺)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절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치며 훼손되어 수차례 중수(重修)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법당 등 14동 150칸의 사우(寺宇 - 절집)가 또다시 완전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모두 한국전쟁 이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조선 초기 범종(梵鍾)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봉선사대종(奉先寺大鐘, 1469년 제작, 보물 제397호)이 있으며, 짜임새 있는 구성과 사실적 묘사 수법을 잘 보여 주는 봉선사괘불(奉先寺掛佛, 1735년 제작)이 모셔져 있습니다.]
큰법당에 오르는 계단 위에는 우람하게 생긴 사자상 한 쌍이 눈을 부라리며 늠름하게 서 있습니다.
멀리에서 범종각을 사진으로 담았지만, 몇 걸음을 옮겨 보물로 지정된 봉선사대종을 촬영할 생각을 왜 못했는지 나중에 살짝 후회했다는 안타까운 후일담을 남겨 봅니다. 그건 아마...... 훗날에 대한 기약으로 생각해야겠지요.
운허 스님의 한글 사랑 정신이 살아 있는 큰법당에 자꾸 시선이 갑니다.
큰법당 앞의 삼층석탑에는 스리랑카에서 공수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큰법당 건물에서는 뭔가 살짝 아쉬운 느낌이 묻어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마 1970년에 큰법당 건물을 지을 때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하지만 지난 2012년에 봉선사 ‘큰법당’이 등록문화재 522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등록문화재란 100년 안팎의 역사를 지닌 작품이나 가치 있는 건물 등을 선정해 보존과 관리가 잘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라고 하는데...... 봉선사 큰법당은 비록 콘크리트로 지어졌지만, 전통 목조양식을 잘 따르고 완성도와 조형감이 뛰어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지요.
절집 건물은 반드시 나무로 지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과 편견에 잔뜩 사로잡힌 어리석은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건물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전통 목조 양식의 고풍스러움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여름날의 태양빛을 닮은 칸나의 붉은 꽃이 큰법당 앞을 더욱 환하게 밝힙니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을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하고......
큰법당 기둥에는 법화경 구절이 한글 주련으로 걸려 있습니다.
설법전(說法殿) 앞을 거니는 부자의 모습이 정겨워 보입니다.
중년 사내들의 발걸음은 한가로워 보입니다.
선열당(禪悅堂)은 절집이라기 보다는 여염의 권세 있는 양반집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시선은 자꾸 큰법당 쪽으로 향하고......
어리석은 중생이 그 큰 뜻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리오......
용맹스럽게 생긴 사자상에도 눈길을 한 번 더......
대의왕전(大醫王殿)에선 건강을 기원하는 불자들의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꽃과 항아리들...... 무엇이든 다 빨아들일 것만 같은 누운 항아리의 시커멓고 둥근 아가리 속으로 어리석은 중생의 부질없는 욕망들이 다 사라져 가기를...... 존재에 대한 인식은 공(空)으로만 남아...... 아니, 남는 것 또한 부질 없으니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로 흔적 없이 사라짐을 꿈꾸고...... 그리하여 꿈꾸는 무인도라......
식수대에 모셔진 석불은 마치 성북동 길상사에서 본 석불과 유사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가톨릭의 성모 이미지를 닮은 불상......
스님들의 수행 공간인 염불원(念佛院)의 고즈넉하면서도 넉넉함이 느껴지는 정경을 담아 봅니다.
시원하게 솟구치는 분수의 물줄기 너머로는 해우소(解憂所)가......
봉선사에서 나오는 길...... 벤치에 앉아 있는 어느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문득 삶에 대한 짙은 여운이 느껴집니다.
굽은 소나무 아래 구부정한 백발의 할머니가 앉아서 먼 곳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다 사진으로 옮깁니다.
새는 자기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가 부러질까봐 걱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지가 부러져 추락하더라도 드넓은 창공으로 다시 솟구쳐 날아오를 자신의 튼튼한 날개를 믿기 때문이라는데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지녀야 할 확고한 신념인 동시에 필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기 앉아 계신 백발의 할머니도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당신께서 살아온 날들의 아름다운 추억의 힘을 믿으며, 어쩌면 또 다른 나날들에 대한 부푼 꿈을 설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봉선사의 여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