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백기완 선생을 만나다

꿈꾸는 무인도 2012. 6. 18. 20:38

 2012년 6월 16일 토요일이었습니다.

 

 백기완 선생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학교에 교과연수년 연수 프로그램이 하나 개설되었는데, 재직하는 곳에서 연수를 들을 수 있어 여러 가지로 편리할 것으로 생각하여 수강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백기완 선생의 강연도 프로그램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20여 년 전, 대학의 낭만보다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에 더 빨리 적응되었던 그때 그 시절,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서 들었던 선생의 그 열정적인 목소리와 더불어 거침없는 포효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선생은 1932년에 나셨으니 만 80세의 고령임에도 그 목소리에서는 여전한 힘이 있었고, 사회 변혁에 대한 열정 또한 그 시절 못지않게 느껴졌습니다. 통일문제연구소장으로서 단순하게 남북관계라는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의 진정한 통일과 화합으로 인식의 폭을 넓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온갖 부조리함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는 선생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선생의 열띤 강연 내내 그 동안 잊고 있었던 20여 년 전의 세월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마음 한편을 후벼 파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매캐한 최루가스 연기로도 막을 수 없었던 젊은 시절의 그 오만함과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설렘으로 가득한 청춘의 콩닥거리는 가슴속에 깃든 애잔한 슬픔의 추억도 또한 있었습니다.

 

 

 이제는 빛 바랜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 시절의 폭풍과도 같았던 환희와 좌절도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의 강연 말미에 자작시 <젊은 날>의 낭송이 이어졌습니다. 또 하나의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너는 지금 뭘 하며 살고 있느냐?

 

 저 아득하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젊은 날 / 백기완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하나를 알면

      열을 행하고

      개인을 이야기하면

      역사를 들이대고

      사랑이 튕기면

      꽃 본 듯이 미쳐 달려가던 곳

 

      추렴거리도 없이 낚지볶음 안주 많이 집는다고

      쥐어박던 그 친구가 좋았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전전하지 않았다

 

      돈벌이에 미친 자는

      속이 비었다 하고

      출세에 연연하면

      호로자식이라 하고

 

      다만 통일 논의가 나래를 펴면

      환장해서 날뛰다 밤이 내려

      춥고 떨리면 찾아가던 곳

 

      식은밥에 김치말이 끓는 화로에

      내 속옷의 하얀 서캐를 잡아주던

      말 없는 그 친구가 좋았다

 

      그것은 내 이십대 초반

      민족상잔 직후의

      강원도 어느 화전민 지대였지

      열 여섯 쯤 된 계집애의

      등허리에 핀 부스럼에서

      구데기를 파내주고

      우리는 얼마나 울었던가

 

      나는

      일생을

      저 가난의 근원과 싸우리라 하고

      또 누구는 민중과 결혼한다 하고

 

      화전민이 답례로 보낸

      옥수수 막걸리로

      한판 벌린 웅장한 아름드리 소나무

      그 위에 걸린 밝은 달 흐르는 맑은 물

      뜨겁게 부대끼던 알몸의 낭만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저 밝은 달 저 밝은

      물만을 대상으로 노래할 수 없다며

      허공을 쥐어박고

      인간의 현장으로 뛰어들던

      빛나던 눈의 그 친구가 좋았다

 

      세월은 흘렀다

      다시 강산에 폭풍이 몰아치고

      이름있는 주소마다 자갈이 물렸다

      더러는 먼저 가고 더러는 물러서서 

      바람이 차면 여울지던 곳

 

      포구의 눈물이라는

      늙다구리 집

      술값은 통일된 후에 준다 하고

      한없이 굽이치는 이의 짓이란

      마냥 그 모양이니 그러자 하고

      이야기가 쭈삣하면

      슬며시 덧문을 닫아주던

      그늘진 그 얼굴

 

      그 후

      그 집은 망했다고

      술꾼들은 발이 빠졌다 하고

      이 찬란한 파국을 미리 울던

      그 여인이 좋았다

 

      그래도 눈물은 분분했다

      가파른 현장에선 독재와 싸우는 이들의 남모를

      예지가 불을 뿜는데

 

      한 번 스친 밤의 꽃을 못 잊어

      소년원까지 찾아가서

      꽃다발을 잔뜩 안고

      서서 울던 그 친구를 생각했다

 

      바로 거기서

      정서적 방랑이냐

      이지적 결단이냐

      꼬리가 꼬리를 잇는 말수를

      냉정히 자르고 떠나간 그 사람

 

      오오,그 확확 뚫던 억센 주먹이여

      이제는 모두 다 어디서 무엇을 하기에

      흰머리가 치마폭처럼 휘날리는 상기까지

      삼십촉 희미한 등불에 젖어

      바시락대는 쌩쥐소리에

      거대한 역사의 목소리 일러 듣는 듯

 

      그렇다

      백 번을 세월에 깎여도

      나는 늙을 수가 없구나

      찬바람이 여지없이 태질을 한들

      다시 끝이 없는 젊음을 살리라

      구르는 마룻바닥에

      새벽이 벌겋게 물들어 온다